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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3. 13世 〉4. <요재공>교암장악원직장공유사(僑菴掌樂院直長公遺事)휘민경(諱敏卿)
1. 문헌 목록 〉13. 13世 〉6. <요재공>병조좌랑증병조참판휘관묘표(兵曹佐郎贈兵曹叅判公諱瓘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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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요재공>첨정공휘기묘갈명(僉正公諱琪墓碣銘)
僉正公諱琪墓碣銘 此寶城之彌力面石虎山南麓負寅抱申而封若堂斧故朝散大夫軍資監僉正趙公之衣履藏也公諱琪字士珍李鮮中宗三十九年甲辰通訓大夫海南縣監諱之漢之子顯陵參奉諱由信之孫谷城縣監諱纘之曾孫庇安縣監諱彭孫之玄孫生員珍原朴胤原之外孫也先世湖之玉川人玉川今淳昌也王麗時諱璋官至門下侍中是爲姓祖繼世顯達諱洪珪版圖判書諱佺玉川府院君諱元吉以道學友善於圃牧陶冶諸賢官至門下侍中玉川府院君諡忠獻諱瑛官典工判書麗社屋罔僕靖獻李朝開運太宗徵以吏判世子師終不起是爲顯祖也今距公世己爲四百年之久文獻無傳不能詳其行治然譜尚傳載公當壬辰兵難之餘載籍灰燼經傳無遺能口誦七書開刊于山陽仍播板册於全邦云嗚呼此豈易事可方於漢伏生之誦傳尚書也大者既傳細之不傳抑何憾焉卒于乙巳十月二十九日享年六十二齊曰令人珍原朴氏進士榮前女墓在公墓後寅原無育繼配靈光丁氏叅軍浩女衛祔于公墓育四男二女男長廷喆次廷元嘉善大夫梁山郡守次廷亨丙子倡義次廷顯薦行義除桃源道察訪同兄倡義贈通訓大夫掌樂院正女歸昌寧曺撰仁川李廷燦孫曰振玉振國相玉振夏振璧昌玉廷元之子盖振玉廷亨之子而入嗣廷元焉振玉振熙振徽振憲昌寧曺益彬清州韓致謹珍原朴萬重妻廷亨所生振瑀振海長興魏東暄坡州廉䢰妻廷顯所生也以下煩不記公墓舊有碑歲久剝落字多不可辨而粗鹵不滿子孫意乃相捻資治石使元柱世勳東旭就余請以所刻文嗚呼暗誦七書今古果有幾人乎而公能之又際焚蕩之餘而傳刻板本以惠全邦厥功豈不偉且大矣乎余以同鄉後生竊自欽尚敢爲之銘曰玉川名冑世濟厥美維公克家經術卓爾功存聖學無遠無邇啓祚無彊有孫有子虎山崔崔程水瀰瀰四尺之封古碑于峙年久磨滅貞石重理我銘偉績示于午紀 歲在甲子上元節 星州 李栢淳 撰 傍裔 仝基 謹書 첨정공휘기묘갈명(僉正公諱琪墓碣銘) 이보성미력면석호산남록에 인좌신향의 번듯한 묘는 고 조산대부군자감첨정조공의 묘소이다. 공의 휘는 기(琪)요 자는 사진(士珍)이니 이조중종삼십구년갑진에 생하시니 통훈대부해남현감 휘 지한(之漢)의 자요 현릉참봉 휘 유신(由信)의 손이요 곡성현감 휘 찬(纘)의 증손이요 비안현감 휘 팽손(彭孫)의 현손이요 생원진원박윤원의 외손이라. 선세는 호남의 옥천인이니 옥천은 지금 순창이다. 왕려시에 휘 장(璋)은 벼슬이 문하시중이시니 시조가 되시다. 대를 이어 현달하시니 휘 홍규(洪珪)는 판도판서요 휘 전(佺)은 옥천부원군이시고 휘 원길(元吉)은 도학으로써 포은목은도은야은(圃牧陶冶)의 여러 현인들과 친교 삼으시고 벼슬은 문하시중옥천부원군이시고 시호는 충헌이시며 휘 영(瑛)은 벼슬이 전공판서이신데 고려가 망하자 굽히지 않고 충성을 다하였으며 이조가 개운하여 태종의 이조판서세자사부로 불렀으나 마침내 나가지 않으셨으니 이분이 현조이시다. 지금으로부터 그 때가 이미 사백년이 되었으니 문헌이 전하지 않아서 그 행실과 치적은 자상치 못하나 족보가 전해 실려 왔으니 공이 임진병란을 당하야 모든 문적이 불에 타고 경전이 남음이 없으니 능히 입으로 칠서를 외워 산양에 개간하고 이에 판책으로 우리나라 전국에 전파하였으니 오홉다. 이 어찌 쉬운 일이리요. 가이 한나라 복생의 상서를 외워 전함같도다. 대략은 전하였으나 세부적으로는 전하지 못했으니 어찌 유감이 아니랴. 을사十月二十九日에 졸하시니 향년은 六十二라. 배위는 영인 진원박씨 진사 영전(榮前)의 녀니 묘는 공묘후에 인좌이고 손은 없으시다. 계배는 영광정씨 참군 호(浩)의 녀니 위례(衛禮)로 쌍분하셨다. 사남이녀를 두셨는데 남장은 정철(廷喆) 차는 정원(廷元)이니 가선대부양산군수요 차는 정형이니 병자에 창의하시고 차는 정현(廷顯)이니 행의로 천하야 도원도찰방을 제수하시고 형과 같이 창의하시니 통훈대부장악원정을 증직하시다. 녀는 창녕 조찬(曺撰) 인천 이정엽(李廷燁)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진옥, 진국, 상옥, 진하, 진벽 창옥(振玉振國相玉振夏振璧昌玉)은 정원의 자니 대개 진옥은 정형(廷亨)의 자로써 정원(廷元)에게 입사하였다. 진옥, 진희, 진휘, 진헌(振玉振熙振徽振憲) 창녕 조익빈(曺益彬) 청주 한치근(韓致謹) 진원 박만중(朴萬重) 처는 정형(廷亨)소생이요 진우, 진해(振瑀振海)는 장흥 위동헌(魏東暄) 파주 염적(廉䢰)처는 정현(廷顯)소생이니 이하는 번거로와 불기한다. 공묘에 옛 비가 있으나 오래되어 이그러져 글자를 분별치 못함으로 자손의 뜻에 맞지않아 서로 자본을 염출하여 새돌을 다듬는데 원주, 세훈, 동욱(元柱世勳東旭)을 시켜 내게 와서 각문을 부탁하니 오홉다. 칠서를 암송하는 이가 고금에 과연 몇 사람 있으랴. 공은 능히 하시고 또 분탕을 겪은 후에 판본을 각하야 전국에 전파하였으니 그 공이 어찌 위대치 않으리요, 나 역시 동향의 후생으로 간절히 스스로 흠상하며 감히 명하여 왈 옥천에 이름난 자손으로 그 미로써 세상을 건졌도다. 오직 공은 집을 잘 다스리니 경술이 탁의하였도다. 공로는 성학을 보존하였으니 먼곳도 가까운 것도 없도다. 복조를 열어 끝이 없으니 손자도 있고 아들도 있도다. 석호산이 우뚝솟고 정자내가 펀펀이 흐르도다. 사척되는 봉분앞에 옛 비가 우뚝 서 있었다. 연구하여 마멸되니 좋은 돌로 다시 만들도다. 내가 기록한 위대한 업적이 천세에 보여 빛이 나리로다. 해 갑자 상원절에 성주(星州) 이백순(李栢淳) 撰 방예(傍裔) 동기(仝基)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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